마리아치를 빼고는 멕시코의 역사와 문화를 말할 수 없어요. 마리아치 Mariachi는 멕시코 민중들의 음악이고 상징이자 정체성을 표현합니다.
치첸이트사의 엘 카스티요
[그림↑] '치첸이트사'는 마야 문명의 가장 큰 도시이며 이 도시를 대표하는 유적인 쿠쿨칸의 피라미드 '엘 카스티요'예요.
멕시코의 문화 형성: 다양한 문화와 민족의 융합
멕시코는 1200년 '올메카'인들의 문화에서 비롯되었어요. 이후 테우티우아칸, 마야, 톨 테카, 아스테카를 비롯한 원주민 문화가 발달하죠. 1521년 스페인에 정복되기 전까지 여러 문명이 공존하였으며, 이들 문명은 300년간 지속된 식민지 시대로 인해 혈통, 종교, 언어가 크게 변하게 됩니다.
멕시코 원주민인 인디오는 스페인의 침략으로 배척받게 되어 피지배층이 돼요. 원주민의 문화가 파괴되는 가운데 크리오요(식민지 시대 후손)와 메스티소(스페인과 원주민 사이의 혼혈)가 태어나며 관계는 더욱 복잡해져요.
이후 멕시코는 멕시코혁명을 거치며 메스티소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종을 통합하고 단일한 국민성 형성을 위해 노력했어요. 그리고 1992년 살리나스 대통령에 의해 원주민에 토대를 둔 다문화적 존재로 표명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마리아치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에서 유래한 음악을 구전하면서 멕시코 만의 독창적인 음악으로 발전시키며 멕시코인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어요.
마리아치 Mariachi
마리아치라는 단어는 멕시코 전통음악 또는 멕시코 전통 기악 연주가를 지칭하며 멕시코의 상징이자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어요. 이젠 음악의 한 장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었어요.
기원
마리아치는 18세기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주 '코쿨라'에서 발생되어 중부지역에 그 기반이 형성된 걸로 추정하고 있어요. 당시에는 구하기 쉬운 타악기, 간단한 관악기를 사용하고 휘파람을 덧붙여 노래하는 단순한 형태였어요. 의상도 평범한 농민의 옷을 입었어요.
어원
여러 학설이 있는데요.
코쿨라 지역에 사는 '코카'족의 원주민 언어로, 그 당시 할리스코주 인근 원주민 촌에서 노래하는 사람을 지칭했다고 하고요.
'나우아틀'어로 필라의 성녀를 찬양하는 노래인 '마리아 세 손'이 변형되어 마리아치로 발음되었다는 주장도 있어요.
프랑스 나폴레옹 3세에 의해 멕시코의 황제로 봉해졌던 막시밀리아노(1864-187) 시대에 결혼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인 마리아주 Marriage 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었는데, 프랑스 군대가 멕시코에 상륙하기 12년 전 '코스메 산타 아나' 신부가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리아치라는 말이 언급된 것이 드러나면서 이 또한 정확한 어원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어요.
이외에도 기쁨, 즐거움, 노래와 동의어라는 등 무수한 가설들이 존재하며, 원주민언어에서 찾고자 하였으나 현재까지는 정확한 어원을 찾기 어려워요.
음악의 성격
초기에는 고대 문명과 원주민 인디오 문화가 잘 나타났으며 스페인에 의해 정복되면서 세속적인 음악과 종교적인 음악으로 나뉘어요. 이후 전원생활이 묘사된 전통적인 노래, 왈츠, 세레나데로 넓혀졌으며 혁명시기에는 코리도(전쟁, 사랑을 노래하는 멕시코 민요) 음악이 주를 이룹니다. 현대 마리아치들은 란체라(3/4박자의 빠른 왈츠풍 무곡), 볼레로(서정적 발라드의 멕시코 대표 노래) 등의 장르를 연주하기도 해요.
악기 구성
악기는 바이올린, 하프, 비우엘라, 기타론, 기타라 등의 현악기와 트럼펫 등으로 구성되었어요. 인원은 2명~20명까지도 구성되고 대부분 연주와 노래를 함께 진행해요.
의상
마리아치는 커다란 챙이 달린 멕시코 전통 모자인 '솜브레로'를 쓰고, 멕시코 전통 승마복이 변형된 '차로'의상을 입어요. 허리까지 오는 재킷과 은이 장식된 달라붙는 바지, 기하학적인 문양이나 스웨이드, 자수가 특정이며 장신구로는 자수 벨트와 큰 나비넥타이를 착용해요.
마리아치의 발달 과정
스페인 정복 시기(1521~1821)
스페인 음악과 혼합되어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 창조되어 전해져요. 또한,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넘어온 선교사들에 의해 종교적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현재 마리아치 악단 구성의 기틀이 마련되죠. 유럽의 현악기로 인해 바이올린, 기타, 하프 등의 구성으로 변화되고, 선교 목적의 종교 음악은 멕시코 토속음악이 가미되어 성모를 예찬하는 형태로 발전했어요. 정복 이후, 멕시코 문화는 지배층과 피지배층, 상류층과 하층민으로 분열되어요. 유럽의 문화를 모방하는 살롱문화, 당시의 낭만주의 음악 이탈리아의 오페라 등 아리아를 즐겨 듣고, 왈츠, 폴카 등의 댄스를 즐기는 파티도 열렸어요. 반면 각 지방에서는 전통음악인 손, 칸시온(낭만적 서정시의 멕시코 대중가요) 같은 음악을 즐겨 들었어요. 지역 간 교류가 활발해지며 음악도 교류되고 이 시기에 발전한 민속 음악은 현재 마리아치 음악의 뿌리가 되었어요.
멕시코 혁명 시기(1910~1917)
혁명이 일어나며 살롱문화는 쇠퇴하고 민중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노래를 부르며 억눌렸던 정서를 표출해요. 이 시기 멕시코 민속 음악은 전성기를 맞이해요. 종교적, 서정적 성격이 줄어들고 혁명군을 빗댄 판초 비아의 '라 쿠카라차(바퀴벌레)' 같은 국가의식을 고양하는 음악으로 변화해요. 민중들은 현실의 고통을 마리아치를 통해 그들만의 정서로 풀어내고 마리아치 음악을 통해 혁명에 관한 소식을 전하기도 해요. 전투나 사건, 유머나 웃음을 자아내는 가사를 붙이기도 했어요.
혁명 이후(1917~ )
1930년대 삶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마리아치들은 '솜브레로'를 쓰고 변형된 멕시코 의상 '차로'를 입기 시작해요. 이후 이 의상은 지역별로 변화되어 현재 각 지방을 대표하는 전통 의상으로 자리 잡았어요.
혁명 이후 멕시코는 정복의 여파로 혼재된 문화 속에서 멕시코 만의 뿌리를 되찾으려고 해요. 침략 이전의 원주민 문화와 고대 문명을 되살리고자 유적 발굴, 벽화운동, 인디헤니스모 운동 같은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어요. 이 과정에서 마리아치 역시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나타나게 되었어요.
여기까지는 마리아치 공연에서 배포한 국립무형유산원 자료를 참고해서 작성했어요.
공연: 마리아치 바르가스 데 테칼리틀란
1897년, '가르파스 바르가스 로페스'에 의해 설립된 '마리아치 바르가스 데 테칼리틀란'은 6세대에 걸쳐 전승된 멕시코 역사상 가장 정통성과 영향력이 있는 마리아치 악단이에요. 2022년, 마리아치 바르가스 창립 125주년을 기념하여 멕시코, 북남미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 수차례 공연을 매진시키며, 독창적인 음악적 색채를 바탕으로 마리아치의 새 역사를 쓰고 있어요.
공연 때 맨 앞 줄에서 직관하고 그 열정과 에너지에 반해서 이 글을 쓰게 되었어요. 이날 객석도 열광이 도가니였답니다. ^0^
마리아치 공연
마리아치 공연과 설명자료(국립무형유산원)
그런데, 스페인은 왜 멕시코를 정복하게 되었을까요.
중세 말부터 유럽에 시장 확대의 파도가 두 차례 밀려와요. 첫 번째는 14세기 르네상스 시대 - 지중해를 무대로 동방으로 확대돼요. 두 번째는 15세기 대항해 시대 - 대서양을 무대로 아시아, 신대륙으로 확대돼요.
첫 번째 시대에 십자군 원정으로 동방무역의 사정이 유럽에 전해지고 향신료 등으로 유럽에 부가 축적되고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눈부신 문화가 형성되죠. 유럽은 세계 시장의 가능성을 보았고 조선, 항해 기술을 발전시켜요. 대서양 연안에 있는 포르투갈, 스페인이 원양항해에 나섰어요. 포르투갈은 아시아, 스페인은 신대륙 방향으로.
포르투갈은 중세 이후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터가 되어 망해가고 있었는데, 막대한 부를 가진 이탈리아와 독일의 제후들이 포르투갈을 구제해 주었어요. 새로운 교역루트를 개발하고자 포르투갈에 투자한 거예요. 포르투갈은 1509년 이슬람의 맘루크 왕조를 격파하고 인도양을 제패해요. 유럽에서 후추는 금과 같은 중량으로 거래될 만큼 고가였고, 포르투갈은 다량의 후추를 들여왔어요. 그런데 후추는 후추일 뿐, 그 거품이 꺼지자 다른 대체 품목이 없는 포르투갈은 이익이 크게 감소하며 이탈리아, 독일의 부유층도 자금을 회수해가요. 포르투갈은 파탄 나게 되면서 스페인에 병합되었어요.
이탈리아인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국왕에게 탐험의 후원자가 될 것을 간청하였으나, 포르투갈 국왕은 이탈리아, 독일의 제후의 원조를 받고 있어서 리스크가 큰 곳에 투자를 할 수 없었어요.
거절당한 콜롬버스는 스페인으로 향했어요. 스페인은 국가 제정이 풍부했지만 신항로 개척은 포르투갈보다 뒤처져 있었어요. 콜럼버스의 탐험에 모험을 걸어 역전해 보기로 했어요.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는데 그곳을 인도로 착각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죠.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 동해안을 조사했지만, 정글이나 황량한 대지만 있고 농산물이나 금은 광산도 없어 이익될 만한 것을 찾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포기 직전인 1513년, 탐험가 발포어가 파나마 해협을 발견했어요. 스페인 제독인 '코르테스'와 '피사로'는 멕시코 땅에서 '아스테카 왕국'을, 페루에서는 '잉카 제국'을 정복했어요. 스페인은 대량의 금은을 손에 넣고 당시에 유럽의 최강이 되었답니다.
멕시코 하면 모자와 선인장만 떠올렸는데, 열정적인 마리아치와 함께 역사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